[인터뷰] 시를 바라보는 겸손한 자세_ 김철성 시인을 듣다.
박준호 기자 입력 : 2022. 03. 15(화) 15:13

김철성 시인 (나주 남평검순소 주무관)
본인을 소개한다면
내보일만한 게 없는 사람의 작은 내보임입니다. 사실 저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별로 내보일만한 게 없는 사람이라서, 그동안 여러 차례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은 있었으나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전에 딱 한번 제 뜻과 무관하게 문화일보 이상원 기자가 라디오 방송인 <양희은의 여성시대>에 투고해 전화인터뷰를 한 적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직 나 어리긴 해도 그래도 나이 탓인지 제가 가진 한미한 재주라도 있다면, 그 것이 좀 더 진보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을 꽃피울 수 있을 한 줌의 거름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쓰여지는 것도 좋지 않을 까라는 마음으로 바뀌어서 이번 <이슈 광주 전남>의 취재에 응하게 됐습니다.
저는 요즘 부상하는 세상의 흐름 중 하나인 노마디즘(유목민의 삶)이라는 가벼운 삶을 오래전부터 좋아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지금 제 나이가 육십인데, 태어난 남원에서 남원농고를 마칠 때까지 20년을 살다가 인천으로 이촌향도 해서 20년을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현재 살고 있는 광주전남으로 내려와서 20년 가깝게 살고 있습니다, 오리지널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 지역을 전전하며 노마드 흉내를 내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제 소개 중 핵심은 아무래도 ‘어쭙잖은 글쓰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소략해서 말씀드리자면, 남원농고 3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시부 차상을 받았던 게, 제 거친 글쓰기의 시작일 것 같습니다. 그때 받았던 상장입니다. 그러다가 인천으로 이거 해 공장생활을 하면서 배다리 헌책방을 통해 두서없이 책을 구입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허나 박람강기가 아닌 주마간산식 독서여서 여전히 부족한 앎을 벌충하려 책을 보고 있습니다.
이후 인천동구청으로 이직해, <자연은 도인이다>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그것이 언론에 실리면서 공보실(보도계)로 발탁되었고, 거기서 저를 스스로 향토자료수집가로 바꿔놨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관내 학교 학생들이 지역역사 바로알기 숙제의 답을 구하고자 공보실로 자주 찾아오곤 했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문화재 관련 담당자가 그런 자료는 없다며 학생들을 되돌려 보내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을 뒤따라가서 잠시 복도에 세워놓고, <인천시사>에서 ‘동구 편’을 복사하여 손에 들려 보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구청에서 자기 지역을 소재하는 책자가 하나도 없는가.”라고요. 그래서 작심했습니다. 고군분투는 아니지만 홀로 향토자료수집과 워드 작업 그리고 출판비 모금을 통해 <동구이야기>라는 책을 만들어 관내 학교에 배포했습니다. 당시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부실한 내용의 책이었지만, 그 책이 계기가 되어 <경인일보>에서는 <인천이야기>라는 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인천동구청에 있을 때 사연 두 가지만 더 얘기해보면, 하나는 글 쓰는 구청 직원들과 관내 주민들이 참여하는 <동구문학>을 만들었던 것이고요. 두 번째는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개관의 단초를 제공했던 것인데, 제가 우연케 인천의 어느 구청 향토자료관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자료관 담당자에게 이거 모두 구 관내에서 수집한 것이냐고 문의했더니 그게 아니고 골동품상에서 일괄 구입해서 구민들 볼거리 제공 차원으로 전시해 놓은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얘기에 작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명칭에 걸맞게 그 지역의 문화유산들만을 모아 전시해야 옳지 않겠느냐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작심을 해서 짬짬이 동구만의 문화유산, 유물들을 근 3년여 동안 ‘많이’ 모았습니다. 그렇게 손때 묻은 동구 유물들로 동구만의 향토자료관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허나 직원들의 냉대 및 무관심으로 자료관 건립은 무산되고, 외려 수집된 유물 중 일부를 수용해서 현재 운영 중인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으로 변경, 개관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제가 좋아서 추진했었던 일이긴 하지만 향토자료관 건립과 함께 추진했던 인천의 향토시인 최병구 시비 조성 등의 뜻을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장고 끝에 이젠 때가 됐나 싶어, 그 길로 귀향을 명분 삼아 광주전남으로 내려오게 됐습니다.
전라남도에 와서는, 인천에 있을 때 모은 향토자료(주로 남원지역)들을 정리해서, 고향 남원시 금지면의 면지형태인 <금지의 서광>을 펴냈고, 남원시청의 보조를 받아, 섬진강의 한 지류이자 남원의 젖줄인 요천수 답사기인 <요천 발원지를 찾아 150리 길을 걷다>를 냈습니다. 그리고 전라남도에 와서 첫 근무지가 <전라남도농업박물관>이었는데, 거기서는 작은 책자인 <바람 부는 날에는 농업박물관으로 오세요>를 발간키도 했습니다.
전남도립대학에 근무하다가 전남도남평검문소로 오게 된 이유는? 지극히 상식적인 인사발령에 의한 전보였습니다. 제가 인천동구청에 있다가 전라남도청에 와서, 첫 근무지가 앞서 말씀드린 농업박물관이었고 두 번째가 도립대학이고 마지막이 도로관리사업소(남평검문소)입니다. 도립대학은 거기에 교내 도서관이 있습니다. 저는 도서관이 탐나서 갔는데, 결국 도서관에서 근무도 못해보고 도로사업소(남평검문소)로 오게 됐습니다. 도서관을 탐냈던 이유는, 도립대학이 있는 행정관청인 담양군과 연계해서 소박한 지역인문학 자료관과 학습장을 조성하고자 했던 개인적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본래 도립대학에 있다가 농업기술원이나 산림자원연구소로 쪽으로 가서 농작물과 나무에 대한 업무를 통한 학습과 홍보를 하면서, 또 <도선국사 답사기> 작업도 좀 해보고 싶었는데, 변방출신에 미관말직이라 어쩔 수 없이 도로사업소로 오게 됐습니다.
그러나 삶이란 게 새옹지마라는 표현이 맞는 듯합니다. 해서 임제스님의 수처작주(머무는 곳에서 주인으로 살라)라는 말을 곱씹으며, 남평검문소에 와서 주인 행세 좀 해보려고 <남평읍지>와 인터넷을 뒤져가며 남평 공부를 했습니다. 남평에 대한 거친 글 몇 편도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기고의 장점은 신문에 글들을 장기간 저장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 남평 지역을 문화도시 생태도시로 변화시키고자 할 때, 형편없는 글이지만 참고가 됐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남평은 드들강을 낀 강변도시라서 물을 주제로 한 생태도시로 가꾸기에 최적지라는 생각입니다. 풍수에서 물은 재물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오행사상의 상생작용인 수생목(물이 나무를 키운다)을 활용한 남평의 풍수주택 조성에서 관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남평 장날이 1일과 6일인 이유도 남평의 산세가 풍수에서 말하는 수성형태이고, 오행에서 수를 상징하는 숫자가 1과 6이라서 그렇게 정해진 것입니다. 또 오행사상으로 문명의 세기인 20세기를 불(火)기운으로, 문화의 시대인 21세기는 물(水)기운으로 보고 있습니다. 불은 물로 식혀내야 건강이 유지될 수 있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입니다.
남평검문소 이름이 생소하다. 남평검문소는 어떠한 일을 하는 곳인가 전라남도도로사업소 관할의 과적차량 검문소입니다. 남평검문소는 전라남도도로관리사업소에 소속된, 남평지역에 설치된 과적차량단속 검문소입니다. 지난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의 원인이 과적차량에 의한 것으로 확인됐지요. 그래서 법령을 만들어 단속을 하고 있습니다. 단속기준의 대표적인 것은 무게를 측정해 적발하는 것입니다. 무게는 총중량과 축중량으로 구분합니다, 총중량은 화물을 싣고 운행하는 차량 전체 무게를, 축중량은 운행 중인 차량 바퀴의 축을 각각 측정하는 것입니다. 이 지면을 통해 화주나 운전자분들께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무조건 총중량은 40톤, 축중량은 10톤을 초과해서 운행하지 말 것은 당부드립니다. 과적으로 인해 발생하는 도로파손은 또 다른 인재인 교통사고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도립대학 근무 당시 <거꾸로 인생> 시집을 발간해 화제가 되었는데 시집을 발간한 이유는 무엇인가
뭐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시집 발간에 대한 말씀을 드리자면, 먼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는데 제가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 같습니다. 좀 무모하긴 해도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행위에 적극성을 보이곤 합니다. 시집 역시 졸작들에 가깝지만 객기를 부려 발간해 낸 것입니다. 시를 좀 아시는 분들이 보면 여전히 설익은 철부지처럼 보일 수 있겠지요. 아직도 문학의 정의에 가까운 글을 써내지 못하지만, 신영복 선생이 <강의>에서 말한,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매우 유용하다”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즉 현실의 아픔을 드러내 환기시키는, 불교식 어법으로 말하면 동체대비가 바로 제 거친 글쓰기가 지향하는 곳입니다. <거꾸로 인생>도 거기에 맥이 닿게 하려고 억지스럽지만 의미부여를 해본 시집입니다.
자유기고가로서 많은 기고들을 작성했다. 원래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는가.
질 들뢰즈가 니체를 말한, 우연의 필연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전히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볼품없는 글이지만 글을 좋아해서 썼던 게 아니고 어쩌다 보니 기고가가 돼버렸습니다. 마치 질 들뢰즈가 <니체와 철학>에서 말한, 우연을 긍정하다 보니 필연의 글쓰기가 돼버린 것 같습니다. 좀 풀어 말하자면, 인천동구청에 있을 때 <인천일보>의 어느 기자분이 제가 향토자료 열심히 수집하는 것을 아시고, 자료수집의 동기에 대한 글을 부담 없이 써달라고 해서 두서없이 써준 것이 기고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머무는 지역인 인천지역, 남원지역, 광주전남지역의 문화관련 글들을 지방 언론사와 한겨레, 경향신문, 세계일보 등에 기고하게 됐습니다.
시와 글들을 많이 쓰는데 특별히 영감을 얻는 곳이 있는가.
있으면서도 없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 경우 글씨기 영감은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려면 우선 막고 품어야 하는데, 즉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봐야 합니다. 그래서 학문에 왕도가 없다는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행여 이것도 영감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딱 한번 제가 정좌하여 명상수련할 때 절로 시가 쏟아져 나온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도 시를 쓰는 능력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어야, 그 느낌을 글로 옮겨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작가인 한양대 정민 교수가 강조했던 입력물이 많아야 출력물이 많다는 말도 그런 의미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철성 주무관께서 이루고 싶은 꿈과 비전은 무엇인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전남지역에 남겨진 도선국사의 자취를 취재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풍수를 잘 알지는 못해도 풍수를 좋아합니다. 익히 알려졌듯이 우리나라 풍수의 비조는 영암출신인 신라 말의 선승 도선국사입니다. 그래서 제 마지막 직장이 전남이고, 도선국사 역시 전남이 고향이기에, 전남지역에 남겨진 도선국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도선국사 답사기>를 써보고 싶은 생각입니다. 일부 자료 수집과 도선국사가 태어난 최씨원 유적과 사생아란 이유로 버려진 국사암 바위, 지리산 이인으로부터 풍수를 전수받은 구례 사도리 지역을 답사를 해 봤는데, 유서 깊은 문화유산의 현장들이었습니다. 근대화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미군정을 거치면서 미신시화 된 풍수가 그나마 최창조 교수의 힘겨운 노력으로 학문반열에 올라온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요즘 부상하는 세상의 흐름 중 하나인 노마디즘(유목민의 삶)이라는 가벼운 삶을 오래전부터 좋아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지금 제 나이가 육십인데, 태어난 남원에서 남원농고를 마칠 때까지 20년을 살다가 인천으로 이촌향도 해서 20년을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현재 살고 있는 광주전남으로 내려와서 20년 가깝게 살고 있습니다, 오리지널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 지역을 전전하며 노마드 흉내를 내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제 소개 중 핵심은 아무래도 ‘어쭙잖은 글쓰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소략해서 말씀드리자면, 남원농고 3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시부 차상을 받았던 게, 제 거친 글쓰기의 시작일 것 같습니다. 그때 받았던 상장입니다. 그러다가 인천으로 이거 해 공장생활을 하면서 배다리 헌책방을 통해 두서없이 책을 구입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허나 박람강기가 아닌 주마간산식 독서여서 여전히 부족한 앎을 벌충하려 책을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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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성 시인의 동구 이야기 |
이후 인천동구청으로 이직해, <자연은 도인이다>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그것이 언론에 실리면서 공보실(보도계)로 발탁되었고, 거기서 저를 스스로 향토자료수집가로 바꿔놨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관내 학교 학생들이 지역역사 바로알기 숙제의 답을 구하고자 공보실로 자주 찾아오곤 했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문화재 관련 담당자가 그런 자료는 없다며 학생들을 되돌려 보내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을 뒤따라가서 잠시 복도에 세워놓고, <인천시사>에서 ‘동구 편’을 복사하여 손에 들려 보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구청에서 자기 지역을 소재하는 책자가 하나도 없는가.”라고요. 그래서 작심했습니다. 고군분투는 아니지만 홀로 향토자료수집과 워드 작업 그리고 출판비 모금을 통해 <동구이야기>라는 책을 만들어 관내 학교에 배포했습니다. 당시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부실한 내용의 책이었지만, 그 책이 계기가 되어 <경인일보>에서는 <인천이야기>라는 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인천동구청에 있을 때 사연 두 가지만 더 얘기해보면, 하나는 글 쓰는 구청 직원들과 관내 주민들이 참여하는 <동구문학>을 만들었던 것이고요. 두 번째는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개관의 단초를 제공했던 것인데, 제가 우연케 인천의 어느 구청 향토자료관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자료관 담당자에게 이거 모두 구 관내에서 수집한 것이냐고 문의했더니 그게 아니고 골동품상에서 일괄 구입해서 구민들 볼거리 제공 차원으로 전시해 놓은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얘기에 작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명칭에 걸맞게 그 지역의 문화유산들만을 모아 전시해야 옳지 않겠느냐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작심을 해서 짬짬이 동구만의 문화유산, 유물들을 근 3년여 동안 ‘많이’ 모았습니다. 그렇게 손때 묻은 동구 유물들로 동구만의 향토자료관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허나 직원들의 냉대 및 무관심으로 자료관 건립은 무산되고, 외려 수집된 유물 중 일부를 수용해서 현재 운영 중인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으로 변경, 개관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제가 좋아서 추진했었던 일이긴 하지만 향토자료관 건립과 함께 추진했던 인천의 향토시인 최병구 시비 조성 등의 뜻을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장고 끝에 이젠 때가 됐나 싶어, 그 길로 귀향을 명분 삼아 광주전남으로 내려오게 됐습니다.
전라남도에 와서는, 인천에 있을 때 모은 향토자료(주로 남원지역)들을 정리해서, 고향 남원시 금지면의 면지형태인 <금지의 서광>을 펴냈고, 남원시청의 보조를 받아, 섬진강의 한 지류이자 남원의 젖줄인 요천수 답사기인 <요천 발원지를 찾아 150리 길을 걷다>를 냈습니다. 그리고 전라남도에 와서 첫 근무지가 <전라남도농업박물관>이었는데, 거기서는 작은 책자인 <바람 부는 날에는 농업박물관으로 오세요>를 발간키도 했습니다.
전남도립대학에 근무하다가 전남도남평검문소로 오게 된 이유는? 지극히 상식적인 인사발령에 의한 전보였습니다. 제가 인천동구청에 있다가 전라남도청에 와서, 첫 근무지가 앞서 말씀드린 농업박물관이었고 두 번째가 도립대학이고 마지막이 도로관리사업소(남평검문소)입니다. 도립대학은 거기에 교내 도서관이 있습니다. 저는 도서관이 탐나서 갔는데, 결국 도서관에서 근무도 못해보고 도로사업소(남평검문소)로 오게 됐습니다. 도서관을 탐냈던 이유는, 도립대학이 있는 행정관청인 담양군과 연계해서 소박한 지역인문학 자료관과 학습장을 조성하고자 했던 개인적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본래 도립대학에 있다가 농업기술원이나 산림자원연구소로 쪽으로 가서 농작물과 나무에 대한 업무를 통한 학습과 홍보를 하면서, 또 <도선국사 답사기> 작업도 좀 해보고 싶었는데, 변방출신에 미관말직이라 어쩔 수 없이 도로사업소로 오게 됐습니다.
그러나 삶이란 게 새옹지마라는 표현이 맞는 듯합니다. 해서 임제스님의 수처작주(머무는 곳에서 주인으로 살라)라는 말을 곱씹으며, 남평검문소에 와서 주인 행세 좀 해보려고 <남평읍지>와 인터넷을 뒤져가며 남평 공부를 했습니다. 남평에 대한 거친 글 몇 편도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기고의 장점은 신문에 글들을 장기간 저장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 남평 지역을 문화도시 생태도시로 변화시키고자 할 때, 형편없는 글이지만 참고가 됐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남평은 드들강을 낀 강변도시라서 물을 주제로 한 생태도시로 가꾸기에 최적지라는 생각입니다. 풍수에서 물은 재물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오행사상의 상생작용인 수생목(물이 나무를 키운다)을 활용한 남평의 풍수주택 조성에서 관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남평 장날이 1일과 6일인 이유도 남평의 산세가 풍수에서 말하는 수성형태이고, 오행에서 수를 상징하는 숫자가 1과 6이라서 그렇게 정해진 것입니다. 또 오행사상으로 문명의 세기인 20세기를 불(火)기운으로, 문화의 시대인 21세기는 물(水)기운으로 보고 있습니다. 불은 물로 식혀내야 건강이 유지될 수 있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입니다.
남평검문소 이름이 생소하다. 남평검문소는 어떠한 일을 하는 곳인가 전라남도도로사업소 관할의 과적차량 검문소입니다. 남평검문소는 전라남도도로관리사업소에 소속된, 남평지역에 설치된 과적차량단속 검문소입니다. 지난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의 원인이 과적차량에 의한 것으로 확인됐지요. 그래서 법령을 만들어 단속을 하고 있습니다. 단속기준의 대표적인 것은 무게를 측정해 적발하는 것입니다. 무게는 총중량과 축중량으로 구분합니다, 총중량은 화물을 싣고 운행하는 차량 전체 무게를, 축중량은 운행 중인 차량 바퀴의 축을 각각 측정하는 것입니다. 이 지면을 통해 화주나 운전자분들께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무조건 총중량은 40톤, 축중량은 10톤을 초과해서 운행하지 말 것은 당부드립니다. 과적으로 인해 발생하는 도로파손은 또 다른 인재인 교통사고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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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성 시인의 거꾸로 인생 시집 표지 |
도립대학 근무 당시 <거꾸로 인생> 시집을 발간해 화제가 되었는데 시집을 발간한 이유는 무엇인가
뭐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시집 발간에 대한 말씀을 드리자면, 먼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는데 제가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 같습니다. 좀 무모하긴 해도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행위에 적극성을 보이곤 합니다. 시집 역시 졸작들에 가깝지만 객기를 부려 발간해 낸 것입니다. 시를 좀 아시는 분들이 보면 여전히 설익은 철부지처럼 보일 수 있겠지요. 아직도 문학의 정의에 가까운 글을 써내지 못하지만, 신영복 선생이 <강의>에서 말한,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매우 유용하다”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즉 현실의 아픔을 드러내 환기시키는, 불교식 어법으로 말하면 동체대비가 바로 제 거친 글쓰기가 지향하는 곳입니다. <거꾸로 인생>도 거기에 맥이 닿게 하려고 억지스럽지만 의미부여를 해본 시집입니다.
자유기고가로서 많은 기고들을 작성했다. 원래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는가.
질 들뢰즈가 니체를 말한, 우연의 필연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전히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볼품없는 글이지만 글을 좋아해서 썼던 게 아니고 어쩌다 보니 기고가가 돼버렸습니다. 마치 질 들뢰즈가 <니체와 철학>에서 말한, 우연을 긍정하다 보니 필연의 글쓰기가 돼버린 것 같습니다. 좀 풀어 말하자면, 인천동구청에 있을 때 <인천일보>의 어느 기자분이 제가 향토자료 열심히 수집하는 것을 아시고, 자료수집의 동기에 대한 글을 부담 없이 써달라고 해서 두서없이 써준 것이 기고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머무는 지역인 인천지역, 남원지역, 광주전남지역의 문화관련 글들을 지방 언론사와 한겨레, 경향신문, 세계일보 등에 기고하게 됐습니다.
시와 글들을 많이 쓰는데 특별히 영감을 얻는 곳이 있는가.
있으면서도 없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 경우 글씨기 영감은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려면 우선 막고 품어야 하는데, 즉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봐야 합니다. 그래서 학문에 왕도가 없다는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행여 이것도 영감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딱 한번 제가 정좌하여 명상수련할 때 절로 시가 쏟아져 나온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도 시를 쓰는 능력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어야, 그 느낌을 글로 옮겨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작가인 한양대 정민 교수가 강조했던 입력물이 많아야 출력물이 많다는 말도 그런 의미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철성 주무관께서 이루고 싶은 꿈과 비전은 무엇인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전남지역에 남겨진 도선국사의 자취를 취재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풍수를 잘 알지는 못해도 풍수를 좋아합니다. 익히 알려졌듯이 우리나라 풍수의 비조는 영암출신인 신라 말의 선승 도선국사입니다. 그래서 제 마지막 직장이 전남이고, 도선국사 역시 전남이 고향이기에, 전남지역에 남겨진 도선국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도선국사 답사기>를 써보고 싶은 생각입니다. 일부 자료 수집과 도선국사가 태어난 최씨원 유적과 사생아란 이유로 버려진 국사암 바위, 지리산 이인으로부터 풍수를 전수받은 구례 사도리 지역을 답사를 해 봤는데, 유서 깊은 문화유산의 현장들이었습니다. 근대화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미군정을 거치면서 미신시화 된 풍수가 그나마 최창조 교수의 힘겨운 노력으로 학문반열에 올라온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준호 기자 hoahn01@hanma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