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의 대숲을 스치는 바람, 계절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빛의 파동. 그 속에서 한 예술가가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의 본질을 탐구한다. 침핀과 진주핀이라는 날카롭고도 섬세한 재료를 통해 ‘질서’라는 화두를 던지는 설치미술가 김재성. 그의 작품은 수만 개의 핀이 모여 만들어내는 고요한 배열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또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반복적인 행위가 빚어내는 수행적 작업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가 된다. 작가는 화려한 색채나 격정적 표현 대신, 절제된 구조와 반복을 통해 질서가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최근 담양 지역사회와 긴밀히 호흡하며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그에게서 작업 세계의 깊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담양, 사유의 터전이자 작품의 근원
김재성 작가가 담양을 작업의 터전으로 삼는 것은 단순히 생활 공간을 선택한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작업 세계가 담양의 자연 및 정신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대숲의 질서 정연한 수직선, 계절마다 다른 빛의 파동, 시간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하는 풍경의 울림은 나의 화면을 지탱하는 근본적 원리와 맞닿아 있다.”

그가 보기에 담양은 아름다운 자연의 고장을 넘어, 질서와 조화, 비움과 여백의 미학이 살아 있는 장소다. 그는 이곳에서 자연이 스스로 짜내는 질서를 관조하고, 그 질서를 화면 속 작은 핀들의 배열로 환원해낸다. 대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듯, 그의 작품 또한 흔들리면서 유지되는 질서를 드러내고자 한다.

담양은 그에게 예술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예술이 도시적 상업 논리에 종속되지 않고, 고유한 리듬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그는 “화려함보다 절제, 과잉보다 본질을 선택할 수 있었고, 그 선택이 곧 나의 작업세계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결국 담양은 그에게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작품의 근원적 에너지를 제공하는 사유의 터전”이다. 그는 담양의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그 호흡을 통해 ‘응고되지 않는 질서’라는 자신만의 미학을 끊임없이 새롭게 발견한다.

대표작 ‘질서에 관한 어법’에 담긴 철학
그의 대표 연작 「질서에 관한 어법」은 질서라는 개념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화면 위 작은 핀 하나하나의 반복과 배열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부분과 전체, 안정과 불안정, 질서와 무질서가 공존하는 살아 있는 구조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다. 그는 이 연작에서 완결된 체계나 고정된 규칙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흔들림과 편차, 미세한 변화가 전체의 리듬을 바꾸는 과정을 통해 응고되지 않는 질서를 표현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그에게 단순한 시각적 실험이 아니라, 삶과 존재에 대한 사유이기도 하다. 세상은 완벽하게 정돈된 체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고 재구성되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화면 속 질서의 떨림과 균형을 관찰하면서 “그 변동 속에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을 탐구한다.”

김재성 작가

예술적 측면에서 그는 의도적으로 많은 것을 덜어냈다. 화려한 색채나 격정적 붓질, 우연적 조형의 즐거움을 배제하고, 오직 절제된 구조와 반복적 행위를 통해 질서가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과정을 관객이 눈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목표다. 이 연작은 시각적 쾌락을 넘어, 질서와 균형, 변화와 흐름을 사유하게 하는 철학적 장을 제공한다. “나에게 「질서에 관한 어법」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존재를 읽고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며, 그 속에서 예술이 지닐 수 있는 본질적 의미를 보여주는 시도이다.”

지역과 소통하며 예술의 본질을 묻다
그의 작업은 개인의 사유에 머물지 않고 지역사회와 적극적으로 관계 맺는다. 그는 자신의 작업 출발점이 “관찰과 사유”이며, “자연과 시간, 사람과 공간의 미묘한 흐름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담양의 대숲과 영산강 줄기, 빛과 바람의 움직임, 지역의 일상은 모두 그의 화면 속 질서와 배열로 환원되는 원천이다. 구상 단계에서부터 그는 시각적 이미지가 아닌 “질서와 균형, 반복과 변동이라는 구조적 관계”를 먼저 생각한다.

최근 그가 직접 기획한 「비움은 채움의 시작」, 「영산강은 나로부터 흐른다」 전시는 이러한 그의 철학이 지역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단순히 작품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지역과 예술, 작가와 관람객이 긴밀히 연결되는 장을 만들고자 했다. 특히 「영산강은 나로부터 흐른다」 전시는 영산강 시원지부터 실제 현장을 답사하고 참여 작가들과 함께 결과물을 도출한 것이 특징이다. 관람객은 이를 통해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실제 강의 흐름과 지역적 생태, 예술적 사유의 연결”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그에게 담양이 “단순한 작업 공간이 아니라 질서와 흐름, 관계를 탐구하는 살아 있는 미술관임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그는 “비움과 채움, 개인과 공동체, 자연과 인간 사이의 미묘한 연결을 체감한 순간들이 가장 소중하다”고 회고한다.

그는 예술이 삶과 공간, 사람을 사유하게 하는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 지역의 젊은 작가들에게는 자신의 작업이 “지역사회와 자연,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현장에서 얻은 경험과 사유를 작품 속에 녹여낼 것을 권한다.” 관객에게는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작품 앞에서 “질서와 균형, 변화와 흐름을 느끼고 사유하는 경험”을 가져가길 바란다. 작품은 완결된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관람자가 함께 참여하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장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작품을 통해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임을 느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