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겨울, 대한민국은 헌정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한 수평적 권력교체를 이뤄냈다. 그것은 단순히 한 정당의 승리가 아니었다. 군사정권 이래 이어져 온 견고한 기득권의 성벽에 균열을 내고, 민주주의의 강물이 새로운 물길을 찾아 흐르기 시작한 역사의 변곡점이었다. 그 중심에 ‘호남 사람’ 김대중이 있었다. 그의 승리는 핍박과 소외를 견뎌온 한 지역의 염원이 마침내 시대의 중심에 섰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김대중의 당선 직후, 호남의 원로들이 청와대를 찾았다. 그들은 갓 취임한 대통령에게 뜻밖의 말을 건넸다. "대통령님, 부디 호남에 시멘트 한 포대, 아스팔트 한 줌 더 보내줄 생각은 마십시오. 그 대신 이 나라 전체를 위한 위대한 대통령이 되어 주십시오. 그것이 호남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이고, 우리가 대통령님을 만든 이유입니다." 이는 지역주의의 사슬을 스스로 끊어낸 위대한 선언이자, 한 명의 지도자에게 지역의 대변인이 아닌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는 통치자가 되어달라는 국민의 명령이었다.

비주류의 길, 민생으로 만나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흐른 지금, 우리는 이재명이라는 또 다른 이름 앞에서 비슷한 역사의 무게를 느낀다. 김대중이 지역이라는 멍에를 짊어져야 했다면, 이재명은 비주류와 변방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기득권의 견고한 벽과 싸워야 했다. 두 사람 모두 주류가 정해놓은 길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대의 과제에 부딪혔다. 김대중이 IMF 외환위기라는 국난 극복을 위해 초유의 결단을 내렸듯, 이재명 역시 ‘이념보다 밥’을 외치며 기본소득과 지역화폐 등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열었다.

그들의 정치는 언제나 논쟁적이었고, 때로는 거칠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이념 전쟁이나 권력 다툼이 아니었다.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즉 민생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한 외로운 분투에 가까웠다. 정치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효능감’의 영역으로 끌고 왔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길은 정확히 겹쳐진다.

모두의 대통령, 결과로 증명하라
이제 대통령이 된 이재명에게 국민이 바라는 것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특정 진영이나 지지층만을 위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바로 그 ‘호남의 염원’과 같은 것이다. 당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까지도 성과로 설득하고, 정쟁의 소음 속에서도 묵묵히 민생의 길을 가는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시대적 요구가 그의 어깨 위에 놓여있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화려한 정치적 수사나 포용의 제스처가 아닐지도 모른다. 필요한 것은 오직 결과로 증명하는 실력이다. 복잡한 경제 위기, 심화되는 불평등, 미래에 대한 불안감 앞에서 국민이 원하는 것은 ‘나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유능한 해결사’이다.

국민의 삶을 바꾸는 준엄한 책무
김대중이 호남의 대통령이 아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라는 요청에 평생으로 답했듯, 이재명 역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찬사와 비난을 넘어 오직 국가와 국민 전체를 위한 길을 가야 한다. 그 길은 외롭고 험난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증명한다. 가장 위대한 정치는 결국 가장 많은 국민의 삶을 구체적으로 바꿔내는 것임을. 그 준엄한 책무가 지금, 대통령 이재명의 시간 위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