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신안군. 켜켜이 깔린 갯벌 위로 햇빛을 수확하는 패널들이 반짝이고, 먼바다에서는 거대한 풍력 터빈이 묵묵히 회전한다. 이 장면은 이제 단순한 풍경을 넘어, 주민 통장에 분기마다 찍히는 ‘연금’이라는 숫자로 이어진다.

“바람이 불면 연금이 나온다”는 문장은 신안군에서 더 이상 수사적 구호가 아니다. 한 지방자치단체장이 법과 제도를 무기로 삼아, 갈등의 구조를 참여와 배당의 구조로 바꿔낸 실험의 결과다. 그 중심에는 박우량 전 신안군수가 있다. 그는 신재생에너지 개발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주민과 ‘공유’하는 것을 정책의 정수로 삼아, 에너지 민주주의를 제도화했다.

신안군 해상풍력단지

갈등을 ‘이익공유’-연금으로 풀었다 한국에서 태양광·풍력 같은 재생에너지 사업은 오랫동안 지역 갈등의 상징이었다. 소음·경관·빛 공해, 환경 훼손 우려는 주민의 반발을 불러왔고, 수익은 외지 사업자가 가져가며 불편과 부담은 지역이 떠안는 구조가 고착됐다. 박우량 군수가 택한 해법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이었다. ‘이익 공유’를 법으로 못 박아 갈등의 뿌리를 끊는 것. 2018년, 그는 전국 최초로 신재생에너지 개발이익 공유 조례를 만들고, 인허가권을 지렛대 삼아 사업 승인 조건에 주민 지분 참여를 의무화했다. 태양광은 총사업비의 30%, 풍력은 40%에 해당하는 지분을 군민 협동조합이 보유하게 함으로써, 지역 주민을 피해 보상 대상이 아닌 ‘주주’이자 ‘정책 주체’로 세웠다. 이 장치가 바로 분기 배당 형태의 ‘햇빛연금’ ‘바람연금’을 낳은 제도적 토대였다.

정책 디자인의 묘미는 두 가지다. 첫째, 법적 근거를 분명히 해 사업자·행정·주민 사이의 게임 룰을 바꿨다는 점. 둘째, 인허가권이라는 실질 권한을 전략적으로 배치해 실행력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제도의 강제력이 있기에 에너지 사업자는 지역사회와 동반자로 설계 단계부터 테이블에 앉게 되었고, 주민은 혜택의 수혜자에 머무르지 않고 이해 관계자이자 감시자로 자리매김했다. 이 구조가 신안군의 사회적 신뢰를 회복시키고, 갈등 비용을 혁신 비용으로 전환시켰다.

신안 2025 햇빛아동수당 전달식

‘연금’이 된 햇빛과 바람: 숫자로 증명된 주민 체감효과 정책은 숫자로 말한다. 2021년 4월, 안좌도와 자라도에서 첫 ‘햇빛연금’이 지급됐다. 주민 2,600여 명이 분기마다 1인당 10만~60만 원을 받기 시작했고, 일부 가구는 연간 수백만 원의 안정적인 추가 소득을 확보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급 수단의 일부를 지역사랑상품권으로 설계해 지역 상권을 직접 순환시키는 경제 구조를 만들었다. 복지의 현금흐름이 소상공인의 매출 회복과 결합하며, 연금이 지역 경제의 모세혈관으로 작동하는 효과를 거둔 것이다.

연금 규모는 꾸준히 커져 누적 220억 원을 넘어섰고, 2026년에는 연간 137억 원까지 예상된다. 특히 만 18세 미만 아동·청소년에게 연간 최대 120만 원의 ‘햇빛아동수당’을 도입해 미래 세대를 직접 투자 대상으로 삼았다. 이 촘촘한 설계의 결과는 인구 통계에 박힌다. 전남 전역이 인구 감소에 신음하는 가운데, 신안군은 드물게 2년 연속 인구가 증가했다. 이 제도가 단순한 소득 보전이 아니라 ‘정주 인센티브’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주민 인터뷰에는 공기가 바뀐 감각이 배어 있다. “예전 같으면 발전소 설치에 결사반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함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드니 오히려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정책이 주민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증언은, 거버넌스 혁신의 결정적 증거다.

제도적 한계와 과제-환경·운영 투명성·수익 안정성 태양광 패널 대규모 설치에 따른 환경 훼손 우려와 풍력발전기의 소음·경관 문제가 여전히 제기된다. 조합 운영, 배당 기준, 출자금 회수 문제에서 투명성을 둘러싸고 일부 갈등이 발생하고, 민간 사업자가 “지방 조례가 상위 법률 근거 없이 규제한다”는 반발을 제기하기도 했다. 여기에 REC 가격 하락, 전력망 한계 등으로 수익 안정성이 장기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위험이 있다.

전국 확산 가능성과 조건 정부가 전국 확산을 위해 주민참여형 이익공유 표준모델을 연구 중이며, 농촌·어촌 지역은 수용성이 높은 실정이다. 인구 소멸지역, 산림·해안 자원이 풍부한 지자체가 신안군 모델을 적극 벤치마킹 중이다.

하지만 대도시나 밀집지역은 대규모 발전시설 설치가 불가능하고, 초기 투자비·인허가 부담, 법적 불확실성은 여전히 장벽이 되고 있다.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 차원의 법률·세제 정비, 주민 설명회와 투명한 정보 공개, 피해 최소화와 보상체계 정착, 소득 수준을 고려한 차등형 배당 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화순군-폐광지역·산림자원과의 결합 화순군은 대표적인 폐광지역으로, 광산지역 경제 회생이 중요한 과제다. 신재생에너지 발전소를 폐광 부지·산업단지 유휴지에 설치하고, 발전 이익을 주민연금으로 환원한다면 지역경제 재생과 맞물릴 수 있다.

이로 인해 광업 쇠퇴로 줄어든 고용과 소득 보전, 청년층 귀향 유도, 산림 복원사업과의 시너지 등의 효과가 예상된다. 과제는 산림 훼손 최소화, 석탄산업 유산 보존과 관광 자원화와의 균형 등이다.

보성군-농어업·관광자원 연계 보성은 녹차밭과 해안선을 가진 농어업 중심 지역이다. 태양광·풍력 발전소를 농어촌형 협동조합과 연계해 주민연금을 지급할 경우, 고령 농민 소득 안정화와 관광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

예상 효과는 농업소득 불안정 해소, 녹차·수산물 브랜드 가치 상승, 체험형 관광과 연계한 ‘에너지-관광 복합 모델’ 구축 등을 들 수 있다. 과제는 자연경관 훼손 논란 최소화, 농민·어민 간 수익 배분 방식 조율 등이 거론된다.

장성군-산림복합문화센터·산림사업 연계 장성은 산림복합문화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고, 산림자원이 풍부하다. 산림 태양광·소규모 풍력과 같은 발전사업을 연금제와 결합하면, 산림복지와 지역일자리 확대를 동시에 꾀할 수 있다.

예상 효과는 주민연금이 산림 복지 프로그램 재원으로 이어져 고령자·청년층 지원, 산림일자리 창출 등이다. 이를 위해서는 산림 훼손에 대한 환경단체 반발 관리, 국유림·사유림 소유권 문제 해결 등이 선결되어야 한다.

전남권 확산의 의미-지역산업 재생·에너지 민주주의 확산 화순, 보성, 장성 등 세 지역 모두 인구 감소와 산업 쇠퇴라는 공통 과제를 안고 있다. 신안군 모델을 변형 적용하면 주민연금제가 단순한 복지수단을 넘어 지역산업 재생, 사회적 신뢰 회복, 에너지 민주주의 확산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만 환경 훼손, 제도적 투명성, 주민 간 수익 배분 문제 등은 공통의 과제로 남는다.

전망-“에너지 전환=지역 복지 확대” 신안군 주민연금제는 단순한 복지가 아니다. 에너지 정책과 복지의 통합으로 발전수익을 주민 복지·교육·인프라와 연계하는데서 나아가 중앙-지방 권한 분산과 주민참여 민주주의 확대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 ‘에너지는 공공재’라는 인식을 제도화하면 국가정책으로 자리잡을 가능성도 있다.

2030년까지 신안군이 추진 중인 풍력 8.2GW, 태양광 2GW가 완성된다면, 주민연금제의 규모와 영향력은 지금보다 수배로 커질 전망이다. 전국적으로도 ‘에너지 전환=지역 복지 확대’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리잡을 수 있다.

햇빛과 바람이 만드는 새로운 패러다임 신안군의 주민연금제는 “자연자원의 개발이익은 주민과 공유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도화한 최초의 사례다. 주민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공동 소유자이자 주체가 되었고, 에너지 전환은 갈등이 아닌 연대의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 모델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선 제도적 보완, 환경영향 관리, 수익 구조 안정화라는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러나 주민연금제는 이미 하나의 방향을 제시했다. “에너지가 곧 복지”, “지방이 곧 미래”라는 메시지를 담아, 신안의 바람은 오늘도 한국 사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불고 있다.